무언가 남다른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특별한 심리 상태가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와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대표적이다. 나는 특유의 상상력을 토대로 자기 최면 상태를 만드는 데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고, 덕분에 작지 않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금융기관처럼 작동한다는 사실은 잘 몰랐다. 마음은 성취의 짧은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그동안 대출해준 긍정성을 한꺼번에 회수해갔다. 이윽고 나는 깊고 무거운 허무감에 빠졌다.
9월은 참 힘든 계절이다. 6월말부터 시작된 고3들의 수시원서 접수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체력이 바닥난 탓도 있지만,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환절기마다 심해지는 알레르기성 비염이다. 비염의 가장 큰 문제는 코막힘이 심해져 수면의 질이 엄청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Mi Fit의 측정 결과, 환절기의 깊은 수면은 1시간 미만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평상시의 1/3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수면이 부족한 뇌는 물컹한 젤리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생쥐처럼 행동한다.
우선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어렵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에 대해 크게 화나거나, 크게 놀라거나, 크게 위축되는 등 감정의 동요가 심해진다. 또한 신체운동 능력이 떨어진다. 목, 허리, 어깨의 긴장도가 평소보다 높아지고, 민첩성이나 반응도가 낮아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기력이 지속된다. 끝으로 정보에 대한 인지 능력과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평소 1시간이면 처리할 수 있는 일이 3시간이 걸린다거나 한 달 전 내가 쓴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같은 몸을 갖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건데, 한마디로 바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부족한 수면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바로 '정서'다. 환절기 며칠 동안 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시달린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떨어지기만 하는 끔찍한 롤러코스터의 탑승객이 된다. 대표적인 증상은 다음과 같다. 아무것도 재미없고 무한정 지루하고 완전히 귀찮다. 어제까지만 해도 중요했던 모든 일에 갑자기 흥미를 잃는다.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되지 않고 사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총천연색의 컬러지만 나의 뇌는 흑도 백도 아닌 회색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이 회색빛 세상에서 나는 앵무새처럼 '지겹다'를 반복하는 허무함의 노예로 전락한다.
허무함은 감정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감정이다. 다루기 어렵다는 의미는 평가절하, 회피, 무시를 특징으로 하는 허무함의 발전적인 활용 방향을 찾기가 어렵다는 의미다.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해서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슬픔, 불안, 분노는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라고 생각되지만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다.
슬픔은 주변 사람과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잠시 떨어뜨릴 수 있게 도와준다. 이를 통해 에너지를 보존하고 자신에게 몰두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불안은 채워지지 않거나 준비되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무의식의 심해에 잠겨 있는 불안의 원인을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숨겨진 퍼즐을 찾고 자아의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분노는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경고를 가능하게 한다. 이를 통해 분노를 무조건 억제해서 생기는 '화병'을 예방하고 자신의 심리적, 물리적 영역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허무함은 정말 위험하다. 하루 아침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그동안 열심히 쌓아온 모든 것을 손바닥 뒤집듯 한순간에 부정하는데, 이걸 어떻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허무함은 아무런 의욕도, 희망도 없는 살아 있는 죽음이다. 
수 년의 시간 동안 나는 허무함의 그림자도 밟아보지 못한 채 정체 모를 이 감정에 꼼짝 없이 당하고만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의 칼럼을 통해 마음이 금융기관처럼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성공의 핵심 요인 중 하나는 바로 긍정성이다. 긍정성은 삶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달릴 수 있도록 하는 심리적 에너지원이다. 특히 동기부여는 매우 많은 긍정성을 필요로 하는데, 그 이유는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의 에너지 폭탄을 성취를 달성할 때까지 계속해서 터뜨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성취를 준비하는 입장이 되면 평소보다 많은 긍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출을 받아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엄청난 양의 긍정성을 대출받은 덕분에 작지 않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성취를 이룬 순간에 나타났다. 마음은 더 이상 긍정성을 제공해주지 않았고 지금까지 대출해간 긍정성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이제는 나를 즐겁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허무함의 정체는 바로 긍정성의 빚을 회수하러 온 채권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