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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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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투쟁의 시간

작성일
2021/09/26 20:17
생성일
2022/08/01 01:29
저자
키워드
#유망주, #어른, #자기증명
분류
상담심리
진로진학
나는 21살 때 교육심리학 과목을 통해 '자기 개념(Self Concept)'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자기 개념은 능력, 태도, 느낌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신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을 의미한다. 이는 '자아 이상(Self Ideal)', '자아 이미지(Self Image)', '자부심(Self Esteem)'이라는 세 가지 하위 개념으로 구성된다. 자아 이상은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사람에 대한 비전을 말하고, 자아 이미지는 자신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말하며, 자부심은 자신의 성격과 태도 그리고 능력에 대한 평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적 구분은 15세 전후로 찾아온 사춘기 때부터 끝없이 이어져온 내면의 투쟁이 발생한 원인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자기 개념을 구성하는 하위 요소들 간의 불일치 때문이었는데, 나의 자기 개념은 카메라를 지지하는 삼각대의 길이가 서로 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핵심은 내가 생각하는 자아 이상을 지지하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고 중에 최고라는 자아 이상을 추구했던 나는 눈에 보이는 점수, 기회, 매출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 가치, 의미든 그에 걸맞은 성취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수능 이후 나의 자아 이미지는 지방대생으로 아주 간단히 대체되었고, 내가 획득한 대학 간판은 부풀대로 부풀어 있던 자부심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나는 마침내 '내가 생각하는 나'와 '세상이 평가하는 나' 사이에 존재하는 큰 괴리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평생을 좁은 우물 속에서 살아온 개구리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결코 명문대를 갈 수 있을만큼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수능 문제를 한번도 풀어보지 않았을 정도로 대입에 무관심했고, 입학 후 교과 내신은 비교적 상위권이었으나 모의고사 성적은 터무니 없이 낮게 나왔으며, 공부보다는 체육이나 미술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어떻게든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명문대의 가치와 치열한 대입 경쟁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생각이었다. 훗날 편입으로 고려대와 연세대에 합격하고 난 뒤 나는 명문대의 간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간판을 따기 위해 오랜 시간 쌓아올린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모의고사 성적표의 백분위와 표준점수의 의미도 몰랐을 정도로 준비가 부족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문제를 찍어 맞추는 요행으로 명문대에 합격하길 바라는 한심한 처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재수를 하면서 '유망주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유망주의 함정이란 최고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으나 가능성만 믿고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 결국 실패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더 이상 근거 없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에 취해 있지 않았다. 대신 매월 치르는 모의고사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많이 맞추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꾸준히 실천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는데,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장황한 전망이나 계획보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성과를 더 알고 싶어하고, 과정에 대한 지리한 설명보다 단순명료한 결과를 더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현재의 성과로 미래의 성공을 볼 수 있고 결과 속에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나는 비로소 어른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 나는 이후 토익 고득점과 어학병 그리고 편입 합격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며 자기 개념의 평화를 위한 길고 긴 투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재수생 A와의 실랑이는 원서 접수 당일까지 이어졌다. A는 6장 모두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쓰고자 했고, 나는 딱 1장만이라도 내가 추천하는 대학을 쓰라고 했다. 어머님은 원장님 말씀대로 하라고 A에게 거의 사정하다시피 매달렸다. 다행이 A는 본인의 뜻을 굽히고 1장을 양보했는데 결국 그 대학을 다니게 됐다. A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포인트는 편입에 대한 나의 경험담이었다. 1시간이나 이어진 설명을 듣고 A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마치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사람처럼 옷을 가다듬었다. 문 밖을 나서는 A의 뒷모습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A의 내면에서도 이제 막 고요한 투쟁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었다.
[바로가기] '어떤 재수생의 고집'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