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목표에 이렇게까지 몰두한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과하다 싶기도 한데, 몇 가지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 먼저 학교를 자주 찾았다. 2박 3일 혹은 3박 4일의 짧은 휴가때마다 빠지지 않고 고려대와 연세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생생한 꿈(vivid dream)은 현실(realization)이 된다는 '시크릿(2007)'에 심취해 있던 터였다. 상병휴가 때는 고려대 정문에 있는 캠퍼스 안내도 게시판의 작은 틈새에 쪽지를 끼워 넣기까지 했다. 그 쪽지는 편입에 합격한 미래의 나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 후 편입에 합격한 나는 2년 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3학년 1학기가 끝날 때쯤에서야 캠퍼스 안내도를 다시 찾게 됐다. 하지만 쪽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나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안내도의 틈새를 실리콘으로 촘촘히 막아버린 상태였다. 나는 2년 전 간절했던 내 모습이 잠깐 떠올라 웃음이 났다. 그리곤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강의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6월의 푸른 잔디처럼 경쾌했다. 
2010년 8월에 제대한 뒤에는 2011학년도 편입학 시험을 준비하며 종종 고려대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대학로에 살고 있어 거리가 가까운 것도 있었지만, 당시의 나는 이미 합격생의 마인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 후 복학 타이밍이 안 맞아 어쩔 수 없이 1학기를 기다린다는 심정이 강했다. 그래서 학교 근처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서 공부를 하며 내년 초에 있을 편입학 시험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사실 5개월에 가까운 이 시간은 상당히 지루했다. 2011년 2월에 맞춰 학점은행제 행정학사를 취득하기 위해 사이버대학 시간제 수업을 듣고 고려대 편입학 1단계 영어능력평가고사인 KUET을 준비하는 등 나름 바쁜 일정을 보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내가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건방져 보일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입시가 끝난 것도 아닌데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아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제대 후 찾아뵈었던 은사님께서는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시더니 대뜸 '비온 뒤 맑게 갠 하늘'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 있었는데, 이어서 군대에서 많은 걸 배우고 성장한 것 같다는 말을 듣고나서야 나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진실된 노력으로 출중한 능력을 쌓은 사람은 이를 스스로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나의 존재감(Presence)은 말보다 빠르게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그리고 내가 누군인지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었다. 
군에서 나는 제대 후 어떤 길로 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여러 선택지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첫 번째 길은 원래 재학 중인 사범대로 돌아가 임용고시를 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 길은 수능을 다시 보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 길은 편입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길은 세 가지였지만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어학병 동기 J 덕분이었다.
J는 어학병 시험을 치뤘던 수원에서 처음 만나 훈련소 그리고 자대까지 같은 곳에 배정받으며 가장 가까이에서 군생활을 함께 한 동기다. J는 미국 아이비리그에 속한 명문대 중 한 곳의 졸업생이었다. 중학교 때 유학을 가서 영어가 유창한 J는 내가 토익 만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며 영어를 잘하는 것 같으니 편입을 한 번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같이 유학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편입으로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봤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말은 사실이었는데, 실제로 내가 입학한 2011학년도 정치외교학과 편입생 중 1명은 미국 동부 주립대의 정치학과 출신이었다. J의 조언은 그때까지 1단계에서 토익점수를 100% 반영하는 서울시립대 편입만 생각하고 있던 내가 고려대와 연세대를 목표로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라고 왜 안 되겠냐(why not)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은 지원전략에 대한 고민이었다.
고려대는 1단계(100%)에서 토플이나 국제어학원에서 시행하는 영어능력평가고사(KUET)로 5배수를 선발한 뒤, 2단계에서 1단계 성적(50%)과 전적대 성적(20%), 전공필기(25%), 그리고 면접(5%)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발했다. 반면
연세대는 영어와 면접을 반영하지 않고 1단계에서 전공필기(100점)로 모집인원의 5배수를 선발한 뒤, 2단계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에 대한 서류평가(50점)를 통해 총점 150점을 기준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했다. 따라서 고려대와 연세대 모두 전공필기가 포함되어 있었고, 1단계를 통과하기 위해서 고려대는 KUET 그리고 연세대는 전공필기가 특히 중요했다. 일반적으로 두 대학은 준비해야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둘 중 하나의 대학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이왕 편입에 도전했으면 최대한 좋은 결과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영어, 전공필기, 자기소개서, 학업계획서, 면접을 모두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가장 준비하기 어려웠던 건 전공필기였다. 나는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첫 번째는 내가 편입까지 하면서 배우고 싶은 전공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고,
두 번째는 해당 전공에서 매년 일정 수의 모집인원을 뽑는지 알아야 했다. 어떤 전공의 경우 1년간 열심히 준비했는데 자퇴나 휴학으로 인한 빈자리가 생기지 않아 시간을 날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학과별 TO(Table of Organization)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3개년도의 모집요강을 살펴보니 대체로 경영학과나 사회과학계열의 전공이 매년 안정적으로 편입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나는 지금까지 축적된 나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았다. 고등학교 때 썼던 수필이나 일기부터 대학 전공 및 교양 시간에 제출한 리포트 그리고 그동안 읽었던 책과 논문 등을 한데 모아 넓게 펼쳤다. 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들을 그룹으로 분류하고 각 그룹별로 대표 키워드를 설정했다. 끝으로 그룹 안팎의 자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시간에 따라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하나의 유기적인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행정학과에 편입하기 전 나는 역사교육을 전공했다.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꿈을 아쉽게 뒤로 하고, 공교육 선진화를 이끄는 훌륭한 교사가 되겠다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범대생이라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교육심리학, 교육사회학, 교육행정학 등의 교직과목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것은 교육 한 분야의 노력만으로 공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정부 주도의 위계적인 정책집행을 특징으로 하는 교육현장의 경직된 분위기를 고려하면 더욱 어려운 일로 느껴졌다.
결론적으로 공교육, 나아가 교육의 혁신을 통한 사회의 혁신은 정치, 경제, 사회 등 교육과 연관된 전 분야의 협력과 지원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바람직한 사회적 토양에서 좋은 교육이 피어날 수 있고, 좋은 교육은 곧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회체제를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고 이를 배울 수 있는 과목을 이리저리 찾아본 결과, 마침내 행정학이라는 학문의 입구에 서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