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에 편입하는 것은 어렵다. 일반적으로 편입이 어려운 이유로 높은 경쟁률을 꼽지만 그것은 본질과 거리가 멀다. 핵심은 어려운 편입학 시험을 통과할 정도의 실력을 쌓는 데 있다. 합격은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높이뛰기의 허들과 같은 평가기준을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과거의 나를 편입의 길로 이끌었던 세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명문대에 대한 갈망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최초의 기억은 TV로 중계되는 농구대잔치를 보며 '안암 호랑이와 신촌 독수리'를 외치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그 구호가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고려대나 연세대 같은 명문대에 꼭 가야한다는 아버지의 당부는 기억에 남았다. 이후 군대 갈 나이가 되어서야 TV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아버지의 한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재학 중인 학교에서 손꼽히는 성적의 우수한 학생이었다.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담임 선생님께서 빚을 내서라도 꼭 대학을 보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6남매 중 둘째인 아버지까지 대학에 보내기에는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이미 장남인 큰아버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할아버지께서 갖고 있던 논의 상당 부분을 판 상태였다. 아버지 또한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동생들이 4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취업을 결심했다. 아버지의 선택으로 할아버지께서는 등록금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됐다. 또한 아버지는 얼마간의 돈을 집으로 부쳐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도왔다. 그렇게 아버지는 효자가 되었지만 대학에 대한 아쉬움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성인이 된 나는 아버지의 오랜 바람과 달리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했다. 대신 안정적인 직업을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고려하여 재수를 통해 사범대에 진학했다.
조금 아쉬웠지만 대학생활은 나한테 꼭 맞았다. 누군가 짜준 시간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과정에서 나는 대학 간판 외에 다른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특히 교육심리학 수업은 위대한 심리학자들을 만나고 이들의 이론을 등불삼아 내면을 탐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시작으로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이론,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그리고 칼 로저스와 매슬로우로 대표되는 인본주의 심리학은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의문들을 명쾌하게 해소하며 이후 지속될 내면탐색의 훌륭한 도구로 자리잡았다. 또한 적성과 흥미를 바탕으로 선택한 수강과목들은 자연스럽게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을 조금씩 확립해 나갈 수 있었다. 자아탐색과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1년 간의 대학생활은 명문대가 생각나지 않을만큼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다 2학년 1학기 때 교육사회학을 수강하게 됐다. 교육사회학은 교육현상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는 학문으로 기능주의적 접근, 갈등적 접근, 그리고 해석적 접근을 취한다.
기능주의적 접근은 사회를 유기체에 비유하며 상호의존적인 하위체계들 간의 통합과 유지를 강조하고,
갈등적 접근은 사회를 개인 및 집단 간의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으로 보며,
해석적 접근은 두 접근이 갖고 있는 거시적·구조주의적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시적이며 행위자 지향적인 접근을 제시한다.
수업을 진행하는 C교수는 서울의 상위권 사립대인 A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KTX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수업시간에 종종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곤 했다. 자신이 국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자리를 못잡고 지방까지 내려왔다거나 지방대에 단체활동이 많고 위계질서가 강한 것은 농업문화적 특성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짧게 지나가는 말이었기 때문에 대수롭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커리큘럼을 매주 진행할수록 C교수의 자조 섞인 농담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5주차의 수업주제는 '학력경쟁'이었다. 학력의 개념과 기능을 설명하고 지위경쟁이론 및 문화재생산론을 바탕으로 학력이 사회적 출세나 지위획득에 미치는 영향과 학력 철폐의 가능성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수업교재로 사용된 김신일 교수의 교육사회학(2018)에 따르면, 학교제도는 거대한 사회적 선발장치이며 학력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수준을 나타내는 공인된 '품질증명'이다.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학력이 지위획득을 위한 합법적인 사다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높은 학력을 취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이때 고졸이나 대졸처럼 교육연수에 의한 수직적 학력주의는 중학교 의무교육, 고등학교 무상교육, 그리고 79.4%에 달하는 대학진학률로 인해 사실상 무의미하고, 같은 단계의 학교를 졸업했더라도 일류대학·엘리트학교 출신자를 다른 학교 출신자보다 높이 평가하는 수평적 학력주의가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지위에 따라 차등적인 보상을 제공하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사회적으로 희소한 자원인 학력을 획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한 경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격에 따라 서로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수평적 학력주의와 학력을 지위획득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위경쟁이론은 명문대에 대한 잊혀진 갈망을 다시 한 번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C교수에 대한 분노를 느꼈는데, C교수의 자조 섞인 농담에서 지방대에 대한 보이지 않는 우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지방대 출신이라도) 사범대생들은 임용고시만 합격하면 되니까 괜찮다는 말은 나를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꼭 명문대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곳은 군대다. 2학년 여름방학 동안 '토익 800점 보장반'을 수강하며 530점이던 내 점수는 885점으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무작위로 선발되는 카투사에 떨어졌고 나는 육군 통역병이나 공군 어학병에 지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무 기간이 3개월 더 짧은 육군 통역병이 되고 싶었지만 시기가 맞지 않아 공군 어학병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은 수원에 있는 10전투비행단에서 진행됐고 영한번역과 한영작문 그리고 인터뷰를 거쳐 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어학병에 합격했다.
합격하고 보니 지방대 출신은 어학병이 될 수 없다던 B선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30명의 동기 중 15명은 코넬대, 워싱턴대, UCLA 등의 해외대 출신이었고 국내파 15명 중 나를 제외한 14명은 전부 SKY 출신이었다. 이들 중 토익 만점은 나밖에 없었지만 나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대학서열의 간극에서 오는 일종의 괴리감이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 출신 대학은 빠져서는 안되는 핵심적인 정보였고, 나는 짐짓 자신 있게 지방대 출신임을 밝혔지만 내 얼굴은 곧 빨갛게 달아올랐다. 스스로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곧 각자 배정된 기지로 전출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상병 때 2009년 키리졸브 독수리훈련에 참여했다. 키리졸브 독수리훈련은 대한민국 국군, 주한 미군, 국외 미군이 함께 수행하는 야외 기동 훈련으로 나는 수도방위사령부의 B-1벙커에서 합동지휘통제체계(KJCCS)에 따라 국군과 미군의 전쟁 시뮬레이션을 지원했다. 이 훈련에는 공군 어학병뿐만 아니라 육군, 해군, 해병대 등 각 군의 어학 자원들이 총출동했다.
훈련은 11일간 진행됐고 이 기간 동안 60여명의 병사들은 3개의 내무실에서 생활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국내파인지 해외파인지,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가 중요했다.
특별히 소개하는 시간이 있던 것도 아닌데 이틀이 지나자 해외파는 해외파끼리 국내파는 국내파끼리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파는 특이하게 고려대와 연세대로 양분됐다. 두 대학의 인원이 상대적으로 많고 서울대는 인원이 적기도 했지만 두 대학 출신들이 확실히 결집력이 강했다. 반면 해외파들은 집단으로 무리짓기 보다는 2~3명 단위로 자유롭게 어울리는 걸 선호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처음에는 연세대 출신의 동기 한 명과 연세대 무리에서 같이 지냈다. 하지만 이내 혼자 다니기 시작했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이상 굳이 피곤하게 그 외의 상황에서 나를 설명하고 증명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그들과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까. 
나는 내가 다니는 대학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이는 대학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즐거운 추억들, 그리고 깨달음의 시간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결국 내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