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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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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이야기

작성일
2021/10/19 16:30
생성일
2022/08/01 01:29
저자
키워드
#죽음, #꿈, #교통사고
분류
상담심리
여기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두 이야기는 늙은 노인과 젊은 청년, 준비된 마지막과 갑작스러운 사고, 죽음과 삶이라는 대비되는 개념을 상징하고 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두 이야기는 내게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요구했다. 나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삶을 이끄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교훈. 죽음은 삶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 늙은 노인의 죽음
평화로운 오후다. 나는 털실로 곱게 짠 스웨터를 입고 돋보기 안경을 쓴 채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파묻고 앉아 있다. 내가 있는 곳은 2층 모퉁이에 있는 나의 서재다. 금방 피곤해지긴 하지만 난 여전히 책을 읽는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냥 재밌어서. 문득 졸립다고 느끼다 갑자기 때가 됐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딱히 누군가에게 급히 알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홀로 이 순간을 조용히 맞이하고 싶다. 나는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에 감탄하며 다가오는 죽음을 느낀다. 머지않아 나는 책을 읽던 그 자세로 깊은 잠에 빠져든다. 나의 임종은 누구도 함께하지 않았지만 사랑과 우정으로 충만한 삶이었기에 전혀 비극적이지 않다. 나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나의 죽음은 2시간이 지난 후 손녀딸에 의해 발견된다. 아들 내외가 오랜만에 집으로 방문한 터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손녀딸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어미가 준비한 다과를 2층으로 가져왔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와 문 앞에서 할아버지를 부른다. 책상 앞에 잠들어 있는 나는 손녀의 부름에 답하지 못한다. 대답이 없자 손녀는 접시를 문 앞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문을 왈칵 열고 내게 달려온다. 손녀는 강아지처럼 내 품을 파고든다. 평소 같으면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만지며 듬뿍 사랑을 주었을텐데, 할아버지가 오늘은 웬일인지 무척 조용하다. 아직 죽음을 모르는 손녀는 할아버지의 목을 얼싸안고 한껏 어리광을 부린다. 하지만 그만 자라고 끈기있게 떠드는 손녀의 목소리는 할아버지의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한다. 그제서야 손녀는 나의 무릎에서 내려가 1층에 있는 엄마에게 간다. 서늘한 기시감이 며느리의 가슴을 스친다. 며느리는 급히 2층으로 올라간다. 이윽고 시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며느리는 조용히 흐느낀다. 서재 중앙에서 한동안 서있다 눈물을 훔쳐 닦고 천천히 내려온다. 그새 TV에 마음을 뺏긴 자신의 딸을 마주한다. 며느리는 딸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알려줘야 하나 잠깐 고민한다. 그리고 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침착한 목소리로 나의 죽음을 알린다. 이어서 내 죽음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전해진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숲과 바다가 근처에 있어 쾌적하다. 죽은 뒤 나는 묘에 묻히지 않는다. 대신 화장한 뒤 땅에 묻고 그곳에 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 바람은 오래전부터 일관되었으므로 내 아들은 내 뜻대로 장례를 치른다. 나의 장례식은 조촐하고 소박하다. 내 묘목 앞에는 내가 쓴 책들이 놓여 있다. 나는 다작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공동체의 미래에 영감을 주는 몇 권의 책을 썼다. 조문객 중 일부가 눈물을 흘리며 나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들은 오래도록 나를 기억해 줄 것이다.
두 번째 - 젊은 청년의 사고
12월의 겨울밤이었다.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채 어딘가를 급히 달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겠다는 내게 A는 꼭 할 말이 있다며 나를 한사코 자기 차에 태웠다. 어차피 똑같은 말이 반복될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A와의 관계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망설이던 나는 별일 있겠냐는 심정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A와의 대화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견해 차는 더 이상 좁힐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덩달아 차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A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설마 하면서도 조금씩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 A에게 나는 내려달라고 소리쳤다. 커브길이 몇 차례 이어졌다. A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이리저리 핸들을 꺾었다. 나는 무게중심을 잃고 차의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인도에 설치된 지상변압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대로 충돌하면 즉사할 것이 분명했다. 찰나의 순간 나는 핸들을 빼앗아 급히 왼쪽으로 꺾었다. 차는 20여 미터를 더 달려 공원 입구의 둔덕을 들이받았다.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내 얼굴은 조수석 앞 글로브박스에 부딪혀 엉망이 되어있었다. 다행히 A 또한 크게 다친 곳 없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셨다. 사고현장의 스키드마크(Skid Mark)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상변압기의 바로 앞에서 시작된 긴 타이어 자국은 맞은 편의 가로수와 전봇대 사이로 이어져있었다. 번갈아가며 늘어서 있는 가로수와 전봇대 중 차가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은 한 군데 밖에 없었다. 우리는 딱 그곳에 골인하듯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기절한 채 클락션을 울리고 있던 A와 나는 지나가던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집 근처 병원에 옮겨졌다.
퇴원 후 나는 마치 사고가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후유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고에 대한 꿈을 반복해서 꿨고, 꿈 속에서 지상변압기를 들이받은 날에는 소리를 지르면서 깨어났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손떨림 증상이 나타난 것도 이때쯤이다. 나는 조금씩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음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바로가기] '삶을 이끄는 죽음'에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