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터질 듯 뛰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면 나는 어쩌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갈림길을 떠올린다. 이윽고 땀에 흠뻑 젖은 채 러닝머신을 내려오며 하루의 루틴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것에 뿌듯해한다. 그리고 어쩌면 30분 남짓의 이 짧은 순간이 지금까지의 내 삶의 축소판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하루는 아파트 단지 내 작은 헬스장에서 시작된다. 40~50대의 주부들이 주요 고객인 이 헬스장은 정말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고 있는 사실상의 친목 공간이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이 화목한 공간에서 나는 주변 풍경에 녹아들지 않는 고독한 이방인이다. 아마 며칠 동안 나를 지켜본 카운터 직원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매일 같은 시간 헬스장에 나타나 가장 구석에 있는 러닝머신에 올라간다. 달리는 동안 TV도 보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는다. 오로지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러닝머신 위에서 전력 질주를 한다. 그러다 이내 큰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기진맥진한 채 헬스장을 나선다.
언젠가 스타벅스 매장에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사용하지 않고 가만히 커피만 마시는 사람은 킬러 거나 킬러 업계에 종사하는 사이코패스라는 농담을 본 적이 있다. 헬스장에 와서 미친 듯이 달리기만 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저 덩치의 정체는 뭘까. 킬러는 아니니 'Crazy Running Machine Guy' 정도로 불러야 하나? 
처음에는 가볍게 즐기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고요한 도심 속 새벽 공기를 가르는 멋진 광고 모델을 상상하며 체형관리와 약간의 자기만족(?) 정도를 원했다. 하지만 달리기를 시작한 지 정확히 하루만에 생각이 바뀌었다. 구체적인 계기는 바로 4km를 달린 뒤 계기판에 찍히는 시간이었다. 4km는 내가 복무했던 비행단의 기지 둘레인데 20대 초반의 나는 20분 정도면 기지 한 바퀴를 충분히 돌 수 있었다. 이는 시속 12km의 속도로, 100m 달리기로 환산하면 30초에 해당하는 평범한 속도다. 그래서 보통 2바퀴,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3바퀴를 뛰곤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일까?
4km를 달리는 데 30분이 걸렸다는 사실은 내게 꽤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숨을 헐떡이며 겨우 30분을 맞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건강을 당연히 여기는 사이에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이후 헬스장은 고독함에 혹독함이 추가된 기록 경신의 훈련장이 되었다. 4km라는 거리는 고정되어 있으므로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속력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속 6.5km로 3분간 진행되었던 워밍업은 1분 30초로 축소되었고, 이후 2km 지점까지 시속 8.5km, 3km 지점까지 시속 9.5km, 그리고 클라이맥스인 3.5km 지점까지 시속 11km를 찍었던 최대속도는 각각 2km/h씩 빨라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워밍업 시간을 생략하고 바로 10km/h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누구도 강제하지 않는 기록 단축을 위해 좋든 싫든 러닝머신에 올라 어제의 나와 경쟁하는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었다. 눈에 보이는 점수, 기회, 매출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 가치, 의미까지 모든 측면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나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엄격히 통제해왔다. 다행히 이러한 노력은 시기와 운이 잘 맞았다.
신발 사이즈에 불과했던 TOEIC 점수를 만점으로 만들었고,
미대 입시, 재수, 편입을 거쳐 명문대 타이틀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전 월 대비, 전 년 대비 매출을 비교하며 얼마간의 돈을 버는 등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각각의 성취는 다음 단계로 올라서기 위한 디딤돌이 되며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한 칸 올라서서 다시금 새로운 러닝머신을 달리는 것뿐이었다.
그동안 포기해야 했던 것들도 많았다. 현재의 즐거움을 계속해서 미래로 미루다 보니 어느 순간 이러한 의사결정이 습관처럼 굳어진 것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시험만 합격하면', '직장 생활의 명운이 걸린 프로젝트만 끝나면', 그리고 '연중 가장 바쁜 입시 시즌만 끝나면'을 주문처럼 외치는 사이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친구들이 줄어들었다. 노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고 나는 점차 무언가 하지 않는 텅 빈 시간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다. 몸은 현재에 존재하지만 정신은 미래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집과 학교, 집과 직장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삶이 만들어 내는 편협함이었다. 주변 시야를 다 가리고 앞만 보며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보고 듣고 경험하는 사람과 사건의 범위가 줄어들다 보니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도 같이 줄어들었다. 그저 계속해서 똑같은 대사와 루틴을 반복하며 주인공의 레벨업이나 퀘스트 달성을 돕는 NPC(non-player character)가 된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one shot)라는 간절함, 단순하고 절제된 삶과 반복된 노력, 그리고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와 갈망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20살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번에는 긴장으로 굳어진 몸과 마음의 힘을 빼고 스스로를 돌보면서 좀 더 여유 있는 자세로 살고 싶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성취의 계단을 올라간다는 것은 러닝머신 위에서 더 빠른 속도로 더 오랜 시간 달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달리는 속도와 종료 시점에 대한 결정권이 내게 없었다. 흔히 높은 직급에 오르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대단한 착각이다. 오히려 반대로 무수한 이해관계자들의 조언, 권고, 추천, 보고, 요청, 문의, 항의, 통보, 압박, 협박에 시달리다 보면 정신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즉, 내가 하는 일의 상하좌우에 여러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웠던 것은 당시의 내가 러닝머신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미친 듯이 러닝머신을 달렸으면 내려와서 땀을 닦고 쉬는 것이 당연한데, 나는 달리는 것 자체에 너무 심취해 있었고 심지어 오만했다. 천천히 달리고 있는 사람이나 내려와 쉬고 있는 사람 그리고 헬스장에 오지 않는 사람들을 한 데 묶어 모조리 게으른 사람 취급하며 더 빨리 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실패가 두려워 잠깐의 휴식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 태양 가까이 날아가다 날개에 붙인 밀랍이 녹아 바다에 떨어진 이카루스(Icarus)처럼 한 순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악화된 건강과 생체 리듬을 회복하는 일은 어려웠다. 나의 몸을 마치 타인의 몸처럼 착취한 결과는 처참했다. 늘어난 체중부터 거북목, 척추측만증, 터널 증후군, 그리고 수면장애까지. 어느 곳부터 손봐야 할지 감도 안 오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정신이 극도로 피폐하고 쇠약해진 것이었다. 나의 장점인 강한 자신감과 특유의 추진력은 사라졌다. 대신 끝없는 허무와 무기력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너는 실패자야'라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무서웠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말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바닥에 붙어서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2달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깊은 내면에서 작은 불빛이 꺼질 듯 반짝거렸다. 그건 오랜 시간 생각, 감정, 오감을 휘두르며 내 삶을 진두지휘한 에고(ego)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진짜 자기(the Self)'의 모습이었다. ‘참나’ 혹은 ‘진아’라고도 부르는 존재의 근원은 내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자신을 '실패자'라고 자책하던 에고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할 말을 잃었다. 내 안의 불빛은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불빛은 원을 그리며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몸 전체를 감쌌다. 에고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이후 몸과 마음의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시작되었다. 3번의 3일 단식과 1일 1식을 통해 6개월에 걸쳐 25kg을 감량했고, 도수치료와 각종 재생 주사로 몸의 균형을 바로 잡았으며, 매일 2시간씩 요가와 명상에 집중함으로써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건강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깨닫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러닝머신에서 내려오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손만 뻗으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기회의 창이 닫히고, 아래로 더 아래로 나를 하강시키는 경험은 삶이 내면 깊숙이 자리한 신성(divinity)을 만나게 하고 준비된 길로 이끄는 방법이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가는 것만이 성공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성공은 땅으로, 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방향에 있었다. 그렇게 바닥 끝까지 내려가 반대편을 뚫고 나온 나는 그토록 찾아 헤맸던 천국에 도달했다. 천국의 요정이 나를 보며 밝게 미소 지었다.
'Crazy Running Machine Guy'는 더 이상 헬스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2km 지점까지 10km/h로 3.5km 지점까지 12km/h로 꾸준히 달리는 내가 있다. 계속해서 속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달리는 것은 확실히 장점이 많다. 우선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중간에 계속해서 속도를 올려야 하고 15km/h로 달릴 때면 좌우 균형이 흔들리거나 러닝머신의 끝자락까지 달리는 위치가 밀려 위험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 좌우 앞뒤를 일정한 간격으로 유지하고 고른 호흡으로 달리는 과정은 심폐지구력은 물론 근지구력 향상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다음으로 더 빠른 시간에 4km를 통과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시속 6.5km, 8.5km, 13km로 달릴 때는 시속 13km 지점에서 체력소모가 크다 보니 달리는 시간을 늘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속 10km, 12km로 달릴 때는 최고 속도는 전 보다 낮지만 시속 10km와 12km로 각각 10분 이상 달리기 때문에 힘을 덜 들이면서 더 빠르게 4km를 주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빠른 속도에 집착하는 것보다 나에게 맞는 속도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달릴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최고점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동영상이기 때문이다.
[PS] 최초 30분에서 @10/16/2021 기준으로 22분 10초까지 시간을 단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