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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배의 짧은 표정

작성일
2021/09/09 15:30
생성일
2022/08/01 01:29
저자
키워드
#토익, #카투사, #어학병
분류
진로진학
리더십
22살의 내게 26살의 예비역 선배는 어른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어른들은 대개 각자의 경험으로부터 획득한 나름의 지혜가 있었고, 이는 말보다는 행동에서 행동보다는 표정에서 더욱 잘 드러났다. 나의 뇌리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두 선배의 짧은 표정이 있다. 한 순간의 표정만으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표정이 두 선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축해 보여주는 일종의 이정표였다는 사실이다.
내가 22살 때의 일이다. 나는 여름방학 동안 토익을 공부하기로 했다. 임용고시를 치르고 선생님이 되는 것이 목표인 사범대생에게 토익은 필수가 아니었지만, 나는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치고 싶었기 때문에 지원에 필요한 일정 수준 이상의 토익점수가 필요했다. 내가 카투사에 지원했던 2007년에는 700점 이상의 점수가 필요했는데 나는 이왕 공부하는 거 최대한 높은 점수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교내 어학원에서 진행하는 ‘토익 800점 보장반’에 등록해 6주간 토익공부에 몰두했다.
카투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같은 영어회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카투사 출신의 A선배가 너무 멋있었기 때문이다. 동아리의 전임 회장이었던 A선배가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꼭 저렇게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해 영어라고는 수능 문제만 접해본 내게 그 광경은 신세계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던지 나를 포함한 많은 후배들은 A선배를 동경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물었는데 그때마다 돌아온 A선배의 대답은 똑같았다. 미군과 영어를 많이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A선배가 입대 전 700점 초반의 토익점수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26살의 예비역 공대생이 직접 보여준 실력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봄 학기가 끝나고 토익 800점을 '보장'해준다는 무시무시한 강의가 시작됐다. 강의는 특정 점수를 보장해야 되서 그런지 이런 저런 의무사항들이 많았다. 오전 중에 강의가 있고 스터디는 저녁에 있었는데, 강의와 스터디를 포함해 세 번 이상 빠지면 자동으로 퇴출되는 방식이었다. 나는 당시 530점이던 점수를 꼭 700점 이상으로 넘겨 카투사에 지원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 방식에 대해 별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오전 강의와 저녁 스터디 사이의 오후 내내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것이 바로 보장반 프로그램이 강제하는 늦은 스터디 시간의 의도였다.
그해 여름 나는 하루 12시간씩 토익을 공부했다. 12시간은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 외에도 샤워하고 밥 먹고 이동하는 자투리 시간까지 모두 합쳐야 나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말 그대로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에 오직 토익만 생각했다. 꽤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점점 더 즐거워졌다. 그 이유는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향해 한 문제씩이라도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매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사가 배정한 스터디에서 나는 또 다른 예비역 선배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스터디의 B선배는 동아리의 A선배와 마찬가지로 26살의 예비역 공대생이었다. 전방의 최전선 부대에서 군복무를 했다고 밝힌 B선배는 우리 조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자연스럽게 조장이 됐다. 한사코 사양하다 어쩔 수 없이 조장 역할을 맡게 된 B선배는 어쩐지 그 자리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밝혀졌다. 처음 한 주 동안에는 숙제도 열심히 하고 결석도 없이 성실하게 조를 이끄는 것 같았다. 하지만 2주차부터는 한 두 번씩 스터디를 빼먹기 시작하더니 3주가 지나고 나서는 아예 스터디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B선배는 총 6주의 보장반 프로그램을 완수하지 못하고 4주차부터는 강의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주차에 B선배와 나눴던 대화가 기억난다. 왜 이렇게 일찍부터 토익을 공부하는지 묻는 B선배의 질문에 나는 카투사에 지원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B선배는 카투사에 필요한 점수가 몇 점인지 묻더니 이내 지방대 출신은 잘 뽑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비해 지방대의 지원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B선배는 카투사 추첨에서 떨어지면 자신처럼 최전방에서 근무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며 자신의 군대 이야기를 늘어놨다. 나는 카투사에 떨어지면 어학병에 도전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B선배는 눈을 크게 뜨며 어학병은 해외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서울의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이 아니면 꿈도 못 꾼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훈련 중에 하버드 출신 어학병을 만났다고 했다. 영어를 엄청나게 잘한다고 엄청나게 똑똑하다고 하여간에 뭐든 다 엄청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뭐가 그렇게 엄청난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을 하는 B선배의 표정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건 마치 우리는 즉, 지방대 출신은 결코 어학병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동아리의 A선배도 확신하는 표정을 자주 지어보였다. 그 표정은 A선배의 간결한 대답과 늘 조화를 이뤘다. 토익을 어떻게 공부하면 되냐는 질문에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대답을, 카투사가 되고 싶다는 말에는 지원하면 된다는 대답을, 그리고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에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무심한 말장난 같은 이 대화는 이상하게도 A선배의 확신에 찬 표정을 보면 꼭 맞는 말 같았다.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해보고, 안 되면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은 A선배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진부하지만 진실된 삶의 교훈이었다. 이후 A선배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에 입사했고 3년 뒤 대학 때부터 만나온 여자 친구와 결혼했다. 내가 본 A선배는 결혼식에서조차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530점이던 내 점수는 6주가 지난 뒤 885점으로 껑충 뛰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성취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온몸을 강렬하게 흥분시키는 마약과 같았다.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지난한 과정을 인내하며 원하는 성과를 얻는 것. 성공의 경험은 너무나 달콤하고 또 달콤했다. 작은 성공이었지만 이 경험은 앞으로 이어질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박제된 교훈이 살아있는 실체로 그 모습을 바꾼 순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주 간단히 성취감에 중독됐다.
B선배와는 이후 두 번 마주쳤다. 한 번은 늦은 저녁 대학교 후문에서 만취해 비틀거리는 모습, 또 한 번은 학교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우리 집 근처의 술집에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두 번째로 마주쳤을 때는 반가운 마음에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취업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힘들다고 했다. 의미 없이 이어지는 짧은 대화를 건성으로 마무리한 B선배는 서둘러 일행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B선배와의 마지막이었다. 그 뒤 B선배는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B선배를 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동아리의 A선배를 떠올릴 때마다 스터디의 B선배가 버릇처럼 함께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22살의 풋내기에게 마냥 어른처럼 느껴지던 26살의 두 선배는 어느새 기억 속에서 서로 다른 확신을 대표하는 두 세계가 되었던 것이다. 1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날의 확신에 찬 B선배의 표정을 만든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표정과 경험 사이에는 어떤 교훈이 있었을까.
그 무엇도 섣불리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어학병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SKY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B선배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진부하지만 진실된 B선배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