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로부터 주어진 꿈은 신기루일 뿐이다. 1박 2일의 짧은 병영체험은 군인에 대한 막연한 상상과 기대를 무너뜨리는 데 충분했다.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훨씬 강렬했다. 인간으로서 모든 자유가 박탈된 그 곳에서 나는 철저히 복종할 수밖에 없었고,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내게 주체성의 상실은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이날 나는 내가 결코 참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서 진로탐색이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미술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나의 갑작스러운 진로 변경에 부모님은 물론, 가까운 친구들과 담임선생님도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미술을 한다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줄곧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군인이 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군인과 미술은 좀처럼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어색한 퍼즐 조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1년 전부터 일찌감치 군인의 길을 포기했다. 그 이유는 사단장이 모교의 후배들에게 특별히 허락한 병영체험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1학년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진행된 병영체험은 호국안보의식 고취를 목표로 1박 2일 동안 군대 내에서 합숙하며 일정에 따라 각개 전투, 유격 체조, 제식 훈련 등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가정을 떠나 낯선 병영에서 생활하며 심신을 강인하게 단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씀하셨고, 담임 선생님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마음 같아선 자신도 함께 가고 싶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부모님은 이 기회를 통해 내가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눈치였고, 이는 다른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작 훈련을 받아야 할 나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 등 떠밀리듯 입소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때의 병영체험은 군인의 꿈을 미련 없이 포기하게 만든 가혹한 경험이었다.
훗날 같은 부대에서 훈련병을 관리하는 조교로 군복무를 마친 친구가 말하길, 우리가 받았던 1박 2일의 짧은 훈련은 4주간 진행되는 기초군사훈련에 비하면 애들 장난과 같은 수준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장난 같은 병영체험이 지옥 같았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대다수의 친구들은 그냥 무던히 병영체험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내게 병영체험은 군인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 낸 좌절의 경험이었지만, 그들에게 병영체험은 고등학교 1학년이 하기에는 조금 특별한 혹은 약간 불편한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몇몇 친구들은 훈련이 재밌었다며 갑자기 직업 군인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지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탈만큼 정서적으로 예민했다. 불안정한 나의 감정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공격성, 터무니없는 무기력과 우울, 그리고 갑작스러운 즐거움과 행복 사이를 종횡무진 했다.
여기에 한층 높아진 감수성이 더해졌다. 내 몸의 모든 감각기관이 활짝 열렸고 덕분에 나는 아주 미세한 자극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극도로 활성화된 오감을 통해 수많은 자극들이 앞 다투어 내면으로 들어왔다. 새로운 정보는 새로운 인식을 만들었고, 새로운 인식은 새로운 질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기존의 질서와 강하게 대립했다. 서로 다른 질서의 무수한 생각과 감정들이 생사를 건 전쟁에 임했고, 그 전쟁의 무대가 된 나의 정신은 극단적으로 피폐해지기 일쑤였다.
나는 폭발하는 감수성과 낙차 큰 조울증이 끝없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감옥을 달리는 데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린 나머지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찼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병영체험을 하고 있자니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핵심은 자유였다. 군대는 개인으로서 갖는 모든 자유가 박탈된 공간이었다. 군에 들어가는 순간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밥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화장실 가는 것, 이동하는 것, 그리고 심지어 걸레를 빨고 너는 방법까지 일일이 통제받아야 했다. 이러한 통제는 나를 철저히 수동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는데, 이건 이제 막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려 발버둥치고 있는 내게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대한 통제는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진정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몸이 통제됨으로써 정신까지 통제되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비하면 훈련병이 예사로 듣는 모욕적인 폭언은 그야말로 장난 같았다. 내 몸이 힘들지 않기 위해 혹은 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며 훈련에 임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꿈과 삶의 의미 같은 속편한 소리는 쉽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 훈련은 언제 끝나는 걸까, 국방부 시계는 왜 이렇게 더디게 가는 걸까, 지금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걸까'라는 불평불만만 가득 찼다. 이러한 생각마저도 훈련 강도가 세지면 깨끗이 사라졌다. 남는 건 먹고 마시고 쉬고 자는 것에 대한 욕구뿐이었다. 모든 생각이 거세된 채 본능만 남은 나는 내가 마치 동물처럼 느껴졌다.
이건 아직 한 번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내 안의 주체성이 시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춘기의 열병을 앓고 있던 17살의 내게 병영체험은 군대라는 곳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는 사람을 만드는 곳임을 확실히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곳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사실 군인은 내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장남인 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일찍 자리 잡길 바라셨던 부모님의 꿈이었다.
부모님의 이러한 바람은 군인이야 말로 나라에 충성하고 국민에 봉사할 수 있는 명예로운 직업이라 생각하는 넷째 작은 아버지의 조언으로 더욱 강해졌다. 내가 자라면서 부모님의 기대는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중학교 때 아버지만큼 키가 컸을 정도로 덩치가 좋았다. 그래서 외관상으로는 보이는 모습은 내가 봐도 영락없이 사관후보생 같았다. 이런 내게 작은 아버지는 명절 때마다 자신의 해군사관학교 시절 얘기를 해주며 군인의 길에 대해 설파하셨고,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작은 아버지가 복무하는 부대에 찾아가기도 하셨다. 심지어 나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견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어느새 부모님과 친지들 사이에서 사관학교에 진학해 군인이 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는 학생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목표는 모래사장에 지어진 성과 다름이 없었다.
군인이 되겠다는 나의 목표에는 군인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과 그로 인해 생기는 자발적인 동기가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의 첫 번째 꿈은 단 한 번의 파도에도 맥없이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병영체험 이후 내 마음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꿈의 당연한 결과였다.
병영체험이 끝난 뒤 학교로 돌아온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유를 박탈당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삶의 진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소중함에 감사할 새도 없이 고등학교 생활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내면에서는 무언가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목표를 다시 설정하기 위한 무의식의 노력이었다. 날카로운 병영체험의 기억은 앞으로 이어질 진로탐색의 고단한 여정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